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문단 편집) === 복무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종 계급은 [[독일 국방군]] [[육군]] [[대령]]. 견습사관 시절 [[기병]]대에서 복무를 시작한 후 초급장교 시기를 줄곧 기병병과 장교로 보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발발 이후 [[기갑|기갑병과]]로 전과했다. 또한 육군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 장래가 보장되는 인재였다. [[폴란드 침공]] 당시 그의 부대(1경사단)는 [[폴란드군]]을 상대로 활약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폴란드 침공과 점령, 폴란드인들의 노예화와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유는 그가 전형적인 [[융커|독일 귀족]]이었기 때문인데, 당대의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를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분할]] 등을 거치면서 과거 자신들이 정복하고 점령했던 지역으로 간주하면서 폴란드계 거주민들을 자신들의 농노로 생각했다.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 침공을 자신들의 '광대한 동방 영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고, 슈타우펜베르크도 이에 동참했으며,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야만적으로 다루는 독일의 행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아예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에 대한 체계적 식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나는 이것이 실행되리라 확신한다."[* It is essential that we begin a systemic colonization in Poland. But I have no fear that this will not occur". Housden, Martyn (1997). Resistance and Conformity in the Third Reich. New York: Routledge. ISBN 0-415-12134-5.] 본래는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소전쟁|러시아 전선]]에서 반유대주의 및 러시아인에 대한 국방군 및 [[SS]]의 만행을 목도하고 반나치 이념에 기울기 시작했다. 사실 독소전쟁 이전부터 [[장검의 밤]]과 [[수정의 밤]]을 계기로 히틀러의 행위에 정의를 쫓는 목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고, 자신의 강한 가톨릭적 가치관에 따른 도덕성과 나치즘의 유대인 박해가 상충하는 상황을 점차 생각하면서 나치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 1월에 [[북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전역|전선]]에서 제10기갑[[사단(군사)|사단]] [[참모]][[장교]]로 전출되었다가 2월에 공습에 휘말려 왼쪽 눈, 오른손 전체, 그리고 왼손 손가락 2개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피규어가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 [[파일:external/www.timewalkertoys.com/CST-134-19-2T.jpg|#]]] 이후 중상에도 불구하고 퇴역하지 않고 후방 행정직 근무로 군무를 계속, [[베를린]]의 육군 보충군(Ersatzheer)사령부[* 당시 독일 육군의 보충군은 신규 입영자원을 포함한 육군 보충병력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독일 전국을 13개 군관구로 나누고, 각 군관구에서 신병 및 동원예비군의 소집/동원과 이의 훈련을 책임지는 것이 보충군 사령부의 임무였고, 이렇게 훈련된 병력을 각 군관구에 연고가 있는 사단에 보충하는 것이 당시 독일 육군의 병력동원체계였다.]의 동원참모로 활동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